근대 이전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에 강력한 통일 국가가 등장하면 바로 그 영향이 주변의 나라들에 전달되었다.

한국, 베트남, 티벳과 북방의 여러 유목민족들이 그러한 경우다. 중국의 통일 왕조는 주변 세력에 대해 복속을 요구했고, 저항할 경우 강력한 힘의 응징이 뒤따랐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조공책봉 관계’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바로 고구려와 당의 전쟁, 그리고 그에 따른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사건에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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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양제의 초상화. 본래 수나라에서 제시한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시호는 명(明)이나,

당(唐)나라에서 비하하는 의미로 올린 양(煬)을 대신 붙여 주로 양제(煬帝)로 불린다.

고구려, 중국과 대등관계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기반을 둔 고구려가 세력을 크게 키운 것은 4세기 초반부터다. 3세기 말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혼란에 휩싸이고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으로 중국에서 5호16국의 분열상태가 조성되면서 고구려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마련된다. 3세기 말까지 중국세력에 밀리던 고구려는 314년 한사군을 완전히 축출하고 요동을 장악한다.
이 무렵 고구려는 북중국의 전진과 우호관계를 맺어 불교를 도입하고, 태학 설립과 율령 반포 등으로 내부를 다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부여를 비롯한 주변 세력들을 제압한다. 이 무렵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최대 영토를 확보하며 만주 지역의 패권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광대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만주지역뿐만 아니라 한강 유역에 이르는 한반도 북부의 농경지대를 확보하면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때 고구려는 대륙 국가이면서도 농경과 유목이 혼재된 복합적인 구조의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5, 6세기 동안 황하와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국 문명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하고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6세기 말 수나라가 남북조의 분열 상태를 극복하고 통일 왕조를 세우면서 고구려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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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보장왕 21년(662년) 고구려군이 사수(蛇水)에서 당의 침공군을 섬멸한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

수나라는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으며, 무리한 고구려 정벌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3대 3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수의 뒤를 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태종 이세민이 통치하면서 민생을 안정시켰다. 당 태종은 이를 바탕으로 645년 마침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이때 고구려는 당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펴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전권을 장악한 상황이었고, 방어태세가 잘 되어 있었다. 당 태종은 결국 안시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당나라는 대규모 병력을 총동원한 전면전 대신에 산발적이며 끊이지 않는 소규모 전쟁을 통해 고구려를 괴롭히는 전략을 선택했다. 일종의 ‘저강도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가 동북아 지역의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당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당은 끊임없는 저강도 전쟁과 함께 말갈, 거란 등 소수 부족에 대한 분열정책, 고구려 내부에 대한 이간책까지 함께 폈다. 연개소문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있을 때에는 이러한 당의 술책이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고, 남생, 남건, 남산 등 세 형제의 후계분쟁과 귀족세력의 내분이 일어나면서 고구려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큰아들 남생은 당의 고구려 정벌에서 길잡이가 되어 나섰고, 남산마저 투항하면서 고구려의 저항의지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고구려의 멸망에는 백제의 공격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신라의 대당 외교도 한몫을 했다. 백제의 계속되는 공격에 존망의 위기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고구려는 옛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외교사신으로 온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김춘추는 거짓 약속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뒤 당나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당은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백제의 공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660년 대규모 병력을 동원,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 멸망으로 고구려는 신라에 배후마저 위협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무렵 고구려의 외교력도 약화되었다. 과거 고구려는 중국의 공격에 맞서 멀리 서역에까지 사신을 파견하는 등 빛나는 외교력을 발휘했으나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돌궐과의 연대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신라의 사활을 건 대당외교와 군사적 움직임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또한 당의 계속되는 공격 때문이기는 했지만, 당과 신라의 백제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고립을 자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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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서기 3년(유리 22년)에 고구려 유리명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우) 5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고분c CC BY 2.0

쌓은 성이며,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지안 현으로 추정된다.

photo by Bart0278, Wikimedia Commons c BY-SA 3.0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을 때 제국의 주변에서 중국 문명을 흡수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며 웅거하고 있던 세력으로 돌궐과 고구려가 있었다. 중국의 천하체제는 주변 지역을 계속해서 중국 내부로 끌어들여 제국의 범위를 넓혀가는 과정을 밟았다.
중국문명을 섭취하면서도 중화체제 내부로 들어오지 않는 주변 이민족들은 중원을 위협할 세력임에 분명했다. 수·당 제국에게는 돌궐과 고구려가 그런 존재였다. 이들을 제국의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다. 수와 당은 돌궐과 고구려를 정벌하는 길에 나섰다. 돌궐은 수와 당의 이이제이를 통한 분열정책과 군사 정벌로 7세기 초에 무력화되었으며, 고구려 또한 70여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 끝에 668년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수와 당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7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벌이며 고구려의 국력을 소진시켰다. 당의 저강도 전략으로 국력이 고갈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라는 강력한 지도력의 공백, 아들들의 후계분쟁, 귀족들의 내분 등이 겹치면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돌궐과 고구려의 멸망으로 동아시아 지역에는 당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고, 신라는 그 질서에 철저히 순응하며 자발적으로 편입되었다. 바다 건너의 왜는 이러한 과정에서 고구려,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통일적인 국가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고구려의 멸망 뒤 20만 명의 고구려인들이 당으로 끌려갔다. 고구려인들이 곳곳에 뿔뿔이 흩어지면서 고구려 옛 땅에서는 문명의 중심이 사라지고 힘의 공백 상태가 생겨났다. 당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해 안동도호부를 세웠으나 고구려 부흥운동과 저항운동으로 그 지배력이 요동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잠시 흑수말갈이 세력을 키웠으나 곧 약화되었으며, 신라도 더 이상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다. 7세기 말에는 이러한 공백을 틈타 발해가 세워졌으나 당에 맞서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하기에는 근본적으로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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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벽화에 그려진 삼족오. 고구려의 기상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고구려처럼 중국 외에 독자적인 세계 질서와 문명을 구축한 나라는 없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동아시아에서는 오직 중국 문명이 독주하는 가운데 유목민족들이 중원을 넘보는 싸움이 진행되었을 뿐이다.
고구려가 중심이 되어 통일이 되었다면 중국 주변의 유목민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쩌면 중원을 정복한 민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만주족이나 거란족처럼 중국의 일부로 흡수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하면서 한반도 내로 우리 역사가 한정되는 바람에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나름의 고유한 역사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시기 동북아의 강국으로 군림하며 중국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세계와 문명을 구축했던 고구려의 패배에 대한 아쉬움을 완전히 떨쳐내는 것은 쉽지 않다. 고구려의 패배를 ‘역사의 실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1,300년도 더 지난 지금, 동아시아는 또 다시 새로운 국제질서를 향한 격동의 과정을 겪고 있다. 1840년대 아편 전쟁 이후 한 세기 동안 서구에 짓밟혔던 중국은 21세기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반면 근대 이후 아시아를 넘어 서구국가로 나아갔던 일본은 상대적으로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또 한 번 군사강국으로 비상하려 하고 있다.
한반도의 경우, 남한은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상대적인 위상의 상승을 가져왔지만 북한은 경제적 추락과 함께 체제보장을 위한 핵무장으로 동북아의 분쟁국가가 되고 있다. 분열된 한반도는 여전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눈치를 보아야 하는 형국에는 변함이 없다.
역사의 전환기에 한반도의 남과 북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까? 어떻게 하면, 1300여 년 전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독자적인 문명을 상실하고, 중국 문명의 한 부분을 껴안고 살아야 했던 ‘역사의 실패’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인가? 복잡하게 뒤얽힌 오늘의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와 요동치는 세계를 보면서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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