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의 여자들

                                            김대근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란 어떤 개념일까? 2천년이상 이어진 남성 중심 사회는 여자를 긍정적으로 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대부분의 서양 석학들은 소비, 모자람, 욕망의 화신으로 평하고 있다. "여자란 돈을 버는 일은 남자의 일, 쓰는 일은 여자의 일이라 생각한다"는 쇼펜하우어, "대부분 여인들의 허리는 무척 가늘지만, 그들의 욕망은 수천 마일이다"라고 말한 터너, "남자의 눈물은 상대방을 괴롭혔다는데서 나오는 후회의 눈물이지만 여자의 눈물은 충분히 괴롭히지 못했다는 후회의 눈물이다" 라고 말한 니체 등의 말에서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는 여자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동양에서는 여자를 더욱 더 낮추어 "여자와 북어는 3일에 한번씩 패야한다",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같은 우리 속담과 "고양이와 여자는 매질을 하지 않으면 살이 오른다"는 일본의 격언, "여자의 입은 악담의 소굴이다"라는 몽고의 속담까지 비슷한 유형을 보인다.


역사의 이면을 고찰해보면 우리가 영웅이라 칭하는 이들은 대부분 여자로 인하여 흥하고 그로 인해 망하기도 했다. 흥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어머니이고 망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연인이다. 공자와 맹자가 어머니로 부터의 지난한 교육을 통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가 하면 네로같은 이는 여자 때문에 멸망의 길을 간 케이스다. 여자때문에 멸망의 길을 걸었던 대부분은 어린시절 어머니의 부재나 재혼등으로 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여 여자에 집착하다 인생을 그르친 경우가 많다. 어찌보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어머니의 그늘을 덮고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들은 난세에 태어나 역사의 짐을 두어깨에 지고 걸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인간으로는 도모지 상상할 수도 없는 스트레스 속에서 삶을 영위한 사람들이다. 그들도 인간이고 보면 그들의 정신에 완충역활은 무었이었을까? 그들도 사람이고 남자인 이상 이성으로 부터 완충재를 받았을 것이다. 기원전 300년경부터 등장하는 알렉산더 로멘스들이 그 짐작에 무게를 더 한다. 독일제국에 전쟁의 막바지로 넘어가는 시기의 히틀러에게는 에바 브라운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군왕 연산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되면서 형성된 성격상의 문제가 겹쳐 여인에 탐닉하다가 정쟁의 빌미를 제공하여 결국 퇴위되었다. 사대부 사상이 지배원리였던 조선에서 여인에 대한 기록은 금기 사항중의 하나였다. 여자는 겹겹이 둘러쳐진 건물들의 제일 후미진 곳으로 밀려났고 세상의 모든 기록들에서 유령이 되어 갔다.


우리 역사에서 영웅의 면모를 놓고보면 임진년의 영웅 이순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잡다한 일상의 일들과 느낌까지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 의례적 기록으로 남은 동 시대의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삶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난중일기는 단순한 한 인간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생활상을 다양하게 엿볼 수 있는 위대한 저작이기도 했다. 그의 일기를 읽다보면 원균에 대한 원색적인 욕이 등장하는가 하면 사이가 나쁜 군주 선조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아 왕에 대한 불만을 은연중 표하기도 할 정도로 진솔함을 느낄 수 있다.


영웅 이순신도 어머니의 그늘을 늘 그리워 했다. 영웅을 만든 어머니들이 강했던것 처럼 이순신의 어머니도 강골이었다. 나이 여든인 노모는 진영에 가까운 남해안의 어느집에서 피난 살이를 하고 있을때 잠시 짬을 내어 하룻밤 같이 지내고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50세가 되던 갑오년(1594년) 이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월12일[신묘/3월3일]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이라도 떠난다는 뜻에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같다.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남긴 7년의 기록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어머니 일 것이다. 한달에 두번 이상 등장한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니 참으로 다행이다."로 끝맺음 되는 이런 안부에 대한 기록은 탐후선을 타고 소식을 전하는 그의 아들이나 집안의 종, 부하들이었다. 조금만 어머니의 소식이 늦어도 "봉과 변유헌, 두 조카들을 본영으로 보내어 어머니의 안부를 알아서 오게 했다." 거나  "하루 걸릴 탐후선이 엿새나 지나도 오지 않으니 어머니 안부를 알 수가 없다. 속이 타고 무척 걱정이 된다. "라고 적었다. 전장의 긴장속에서도 그는 늘 어머니의 안부를 궁금해했고 어머니의 안부만으로도 전장의 피로를 씻었다.


이순신도 사대부인지라 내자(아내)에 대해 언급하지 않던 당시의 풍습을 답습하고 있다. 한달에도 서너번 등장하는 어머니에 비하여 아내는 예닐곱번 등장한다. 갑오년(1594) 8월27일 부터 9월2일까지 인데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 보냈다.", "맑고 바람조차 없다.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수 없다.",  "맑다.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으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염려스럽다."로 적어놓고 있다. 체면상 표현하기 어려운 내자(아내)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어쩌면 어머니의 안부는 곧 아내의 안부이기도 했을 것이므로 "어머니가 평안하시다니 다행이다"라는 글에는 아내 역시도 평안하여 안심이 된다는 뜻도 있었을 것이리라. 꽤나 자상한 성품이었던 그는 을미년 (1595) 5월16일 일기에서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시다고 하고, 아내는 실수로 불을 낸 뒤로 마음이 많이 상하여 담천이 더해졌다고 한다. 걱정이 된다."고 적어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이순신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는 한 장면도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 했을 때다. 당쟁의 희생양과 선조의 질투로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가 다시 풀려나 얼마지 않아 어머니의 부음을 접한다. 정유년 (1597) 4월16일의 일기다. "궂은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며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뒷날에 적다) " 오죽하였으면 죽고싶다는 말을 내 뱉었을까 싶다. 5월 6일에는 죽은 두형이 나타나 상중인데도 군무에 종사함을 통곡하는 꿈을 꾸고는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라고 적고 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일기에 세번째 적은 것은 아끼던 막내아들의 죽음이었다. 정유년 10월 14일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으며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라고 적어 안타깝게 한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남자로서의 욕망을 해결했어야 할 것이다. 전장을 떠돌던 무장이지만 아직은 피가 식지 않은 50세로 여자가 필요한 때이기도 했다. 당시 사대부가의 남자들이 대체적으로 그러하듯이 그에게도 첩이 있었던듯 하다. 1594년 9월15일 일기에서 "부안 사람이 꿈속에 아이를 낳았는데 달수를 헤아려보니 낳을 달이 아니어서 꿈속이지만 내쫓았다”고 적고 있는데 관계한 달수까지 헤일 정도였던 부안사람은 첩이었던듯 여겨진다.


병신년 (1596)은 이순신에게도 무척 힘든 해였다.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명나라와 왜군들간의 지리한 휴전협정이 계속되고 있었고 왜군들은 화친회담을 빌미로 마음대로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협상중이므로 함부로 적을 칠 수도 없었다. 조정은 조정대로 이순신에게 나가 싸울것을 압박했다. 라이벌인 원균과 그의 뒷배경인 윤두수등은 끊임없이 이순신에 대해 음해했다. 이순신도 조정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이런 기류를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야 말로 정신이 몇 배나 피곤한  시절이었다. 스트레스는 끝없이 쌓여갔다. 그래서 인지 이 해에는 유난히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일기에 오른다. 이 해 9월12일 "길을 떠나 해가 질 무렵 무장(茂長)에 이르러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하루 더 유숙했다'여진'과 두번 관계했다", 9월 15일 "체찰사가 '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어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여진'과 세번 관계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난중일기 국역본에는 빠져있다. 아마도 이순신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인간적인가? 여진이라는 여인은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연인으로 나중에 비극적 최후를 맞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상은 관에 매인 관노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관아마다 관노가 있었고 수령이나 외부 손님의 몸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9일의 여인은 좀 색다르다. 이날 광주목에 들러 있었는데 마침 이날 광주목사 최철견이 파직되었다. 이날 밤에 파직된 광주목사 최철견의 서출 딸인 최귀지가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당시의 풍습은 장군들이 진중에 첩을 데리고 다니는 일이 흔했다. 일본 수군과의 전투에서 군장의 목을 베고 첩으로 살던 조선 여인을 구하기도 했으므로 피아간에 흔히 있던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순신은 최소한 진영에서만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일부 장졸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1593년 5월 30일의 일기를 보면 "해질 무렵 남해 현감 기효근이 우리의 배옆에 배를 대는데, 배 안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 두려워 한다. 가소롭다. 나라가 위급할때 미인을 태우고 놀아나다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하랴... 그러나 그 대장 원균수사부터 그러하니 어찌하랴" 하고 통탄하기도 하고 전쟁이 한참 이던 때에 항구를 중심으로 한 매춘조직을 단속하여 우두머리에게 죄를 내렸다는 기록도 있었다. 당시 사대부로써 여색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여진이라는 여인과 잠자리를 하기 하루 전인 병신년 (1596)  9월11일에는 "산월"(山月)과 술 마시며 얘기하다가 밤이 깊어 헤어졌다"는 기록과 함께 말미에 "누명을 벗길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초서로 휘갈겨 써놓으면 '세歲'와 '내萊'가 비슷해 보이는데 그동안 세산월로 잃혀져 왔으나 최근의 연구들은 실존했던 명기 '내산월萊山月'로 확인하고 있다. 내산월은 선조 때 문신 이춘원(1571∼1634)이 내산월을 위해 남긴 시가 전해져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이다. 전쟁통에 이순신을 만나러 한양의 명기가 멀리 영광까지 걸음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이채롭다. 게다가 마지막의 글월 "누명을 벗길 수 없었다"라는 말은 또 무었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춘원이 남긴 <구원집>에는 한양의 명기 내산월에게 준 시가 있다. "스스로 예쁜 것만 믿다가 홍등가에 잘못 드니 천애의 땅에서 영락할 줄 어찌 알았으랴./번화한 거리에서 한번 더럽혀지고 바닷가 꽃 속에서 부질 없이 풍월 읊네./한 가득한 오주에서는 봄 풀이 푸르고 꿈 깨는 금고에서는 석양빛 짙네./ 아름다운 얼굴 빌려오지 못하고 나이만 들었으니 붉은 촛불과 맑은 술잔 그대 어이하리오."


너무나 큰 역사의 짐을 어깨에 지고 돌린 충무공 이순신…. 명성에 가려진 그의 인간다움이 더욱 그를 그립게 한다.

 

 

출처 : 김대근시인의 블로그 "반디불의 똥꼬"
글쓴이 : 김대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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